충돌
고경란
나는 이따금 영에게 화가 났다. 속에서 무언가 솟아올라서 자주 한숨을 쉬었다. 그게 답답함이라는 걸 알아채는 데에는 대강 일 년쯤 걸렸다. 하나뿐인 동생의 의사를 무시하려는 건 아니었지만, 영은 과해도 너무 과했다. 가족 외식이 있을 때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것만 해도 그랬다. 나는 고기 안 먹고 싶어. 알잖아. 그러곤 미안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영은 가족모임에도 자주 빠졌다.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영에게 화를 내기도 애매했다. 나는 몇 년 전부터 영이 준 홍삼이나 발포 비타민이나 호두 정과 따위를 들고 부모님을 만나러 갔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영아, 정말로 안 갈 거야? 내가 묻자 영은 곤란하다는 듯 웃었다.
“언니, 나 오리는 좀 그래. 새는 먹기 싫어.”
“그럼 돼지는? 그 식당 삼겹살도 있댔어.”
“싫어, 그냥 다음에 보자. 엄마랑 아빠한테는 언니가 말 좀 잘 전해줘, 응?”
“너는 진짜… 알겠어. 그럼 다음에 같이 카페 갈 때나 보자고 전할게.”
고맙다는 말을 덧붙인 영이 방에서 무언가를 꺼내왔다. 저번에 사둔 홍삼세트야. 언니 거 하나랑 엄마, 아빠 거 하나씩 준비해놨어. 눈알을 굴리며 쇼핑백을 내미는 모습에 그만 웃음이 터졌다. 눈치를 보는 모습에 어린 시절의 영이 떠올랐다. 영은 닭강정과 미미 인형, 반짝이 스티커를 좋아했다. 그래서 엄마는 영의 생일날이면 퇴근길 시장에 들러 닭을 튀겨왔고, 아빠는 프랜차이즈 빵집에서 미미 피규어가 꽂힌 케이크를 사 오곤 했다. 나는 용돈을 털어 스티커를 샀다. 영은 언제나 자리에✱서 방방 뛰며 좋아했다. 이젠 아득한 시절이다. 눈앞의 영이 조금 낯설었다. 가족 중 그 누구도 영을 무시하려고 한 적은 없었다. 모두가 그랬다. 처음에는 영을 설득해 보기도 했다. 오랜만인데 엄마랑 아빠 원하는 곳으로 가자. 널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달리 적절한 곳은 없잖니. 매번 순한 막내였던 영이 거세게 반대를 한 것도 이 문제가 처음이었다.
✱
또 안 왔어? 혼자 온 나를 보며 엄마는 한숨을 크게 쉬었고 아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몇 번 공감해주던 둘도 이제는 점점 못마땅한 기색을 비췄다. 어휴, 그래서 비싼 홍삼세트도 대신 보냈잖아요. 나는 애써 그들을 달래며 불판 위에 오리고기를 올렸다. 자주 만나지도 못하는데. 아빠가 아쉬워할 때마다 영이 내게서 멀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지금의 영이라면 어릴 때부터 모은 용돈을 합쳐 치킨을 사 먹던 추억이나, 학교 앞 분식집에서 닭꼬치나 소떡소떡을 사 먹던 추억들을 전부 잊고 싶다고 말할 테니까.
역시 고기 질이 좋네. 아빠가 불판에 고기를 올리며 말했다. 그러게. 나는 대강 대꾸하며 익은 고기를 불판 한쪽으로 치웠다. 너 먼저 먹어봐. 고갯짓하는 엄마의 말에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이가 살점을 뭉개자 육즙이 흘러 혓바닥에 닿았다. 와, 이 집 여전하네. 내가 말하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젖히자 뜨거운 숨이 빠져나왔다. 아빠가 내 어깨를 치며 웃었다. 천천히 좀 먹으라니까. 사장님이 웃으며 우리에게 다가와 물었다. 왜 이렇게 오랜만이에요? 얼굴 다 까먹을 뻔했잖아. 어릴 때부터 종종 오던 곳이라 그런지 사장님은 오랜만에 와도 여전히 우리를 기억했다. 그동안 바뀐 것들을 이야기해주던 사장님이 자랑했다. 몇 주 후에 모 유명 예능에 식당이 소개된다고. 숨은 맛집이라 좋아했는데 아쉽다고 아빠가 말했다. 문득 머릿속에 딱 한 번 가족모임으로 갔던 비건 식당이 스친다. 역시 콩고기 같은 대체육과는 끝맛이 다르네. 고기를 계속 씹었다. 맛있다. 엄마가 감탄했다. 사장님, 2인분 추가요. 내가 외쳤다. 다음부터는 줄을 서야 할지도 모르니 많이 먹어두자. 결연한 표정의 엄마가 말했다. 우리 식당 오리고기는 도축된 지 얼마 안 된 거라 질이 더 좋아. 내 생각이지만 이 오리가 제주도 흑돼지보다 좋을걸요. 사장님의 말이 지당하다는 듯 아빠가 엄지를 척 들었다. 엄마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그래서 우리가 삼겹살 안 먹고 여기로만 다닌 거죠. 나는 불판 위의 고기를 하나둘 뒤집었다.
“맞다. 막내는 안 왔어요?”
아, 바빠서 못 왔어요. 시간이 잘 안 나는 것 같아요. 내가 적당히 변명했다. 하긴, 요즘 젊은이들이 많이 바쁘긴 해요. 고생이 많겠다. 사장님이 아쉬운 표정으로 웃었다.
“그 친구가 오리고기를 진짜 잘 먹어줬는데. 나중에 오면 서비스 주겠다고 전해줘요.”
그럼요. 엄마는 표정을 조금 굳혔고 아빠는 어색하게 웃음을 흘렸다. 조용해진 우리들 틈으로 지글지글 고기가 익는 소리만 선명하게 들렸다.
“네가 영이한테 말 좀 해봐.”
내내 조용하던 엄마가 나지막이 말했다. 내가 계산을 마치고 밀크커피 두 잔을 뽑았을 때쯤이었다. 뭘요? 내 대답에 엄마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뭐긴 뭐겠어. 영이가 매번 안 오는 거 너무하다고 생각 안 해? 우리가 고기만 먹으라고 강요를 한 것도 아니고. 나는 뭐라 둘러댈 말을 찾으려 이리저리 시선을 굴렸다. 음, 그게, 그건. 아빠가 화장실에서 나온 건 내가 말을 질질 끌며 시간을 벌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 뭐냐, 채식 식당인가 거기 갈 때 보면 되지. 엄마의 어깨를 감싼 아빠가 말했다. 나는 애써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언제까지 그럴 건데. 엄마가 약하게 고개를 저으며 차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밀크커피 한 잔을 건네자 아빠가 말했다.
“영아, 나도 너희 엄마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그렇다고 영한테 뭐라 하고 싶은 건 또 아니지만.”
“저도요.”
나는 별 사족 없이 동의했다. 그래서 심란한 걸지도 몰라. 아빠는 밀크커피를 홀짝이다 바닥의 자갈을 툭툭 쳤다. 나도 밀크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바닥의 자갈을 툭 찼다. 자갈은 조금 굴러가다 멈췄다. 제가 영을 좀 지켜볼게요. 그래, 고맙다. 내 말에 활력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우리는 쓰레기통에 종이컵을 버리고 차를 향해 걸었다. 밤이 깊어갔다.
✱
영은 토요일이면 밖으로 나간다. 집 건너편 족발 트럭과 코너를 돌면 나오는 만두가게를 지나친다. 햇살을 받아 매끄럽게 반짝이는 빌딩 숲도 지나고 유행하는 노래가 흘러나오는 카페로 간다. 숲을 뒤로 한 투명한 유리창에 모습이 비치면 이전처럼 머리를 슬쩍 정돈했을 것이다. 왁자지껄한 자동차 경적 틈에서 빠져나온 영이 가는 곳은 우리가 오랫동안 살던 아파트였다. 우리가 살던 집은 거대한 유리 방음벽 바로 앞이었다. 고속도로로 향하는 길이었기 때문에 세워진 것이었다. 영은 그곳에서 부딪쳐 죽은 새들의 수를 세고 사체를 수습한다고 했다. 아파트 경비가 치우지 않느냐는 내 말에 자신은 기록을 하러 간다고 말해주었다. 사체의 수를 세고 기록해 앱에 올렸다. 나중에 저감조치를 요청할 때 증거로 쓴다고 했다. 영이 처음으로 가족 모임에 불참했을 때 내게 말해준 내용이었다. 고기 냄새를 맡으면 자꾸만 새가 떠오른다고 했다. 새의 머리뼈는 자세히 보지 않으면 자갈과 흡사하고, 부패가 진행된 사체에는 무슨 애벌레가 살기 시작한다고도 알려줬다. 영은 생각보다 더 이 일에 심취한 것처럼 보였다. 막상 살 때는 가본 적도 없는 관리사무소도 들락거린다고 했다. 방음벽에 취해야 하는 조치에 대해 설득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그런 영에게 네가 힘들지 않을 정도로만 하라고 덧붙였지만, 영은 힘들어하면서도 그만두지 않았다. 아파트에서는 몇 달에 한 번씩 관리비로 방음벽을 청소하기도 했다. 물이 묻은 방음벽 너머로 주변의 풍경이 찌그러질 때면, 영은 꼭 바다에 온 것 같지 않냐며 좋아했다. 영의 감수성을 그대로 가진 아빠도 깨끗한 방음벽에 비치는 햇살이 유독 반짝인다며 좋아하곤 했다. 오랫동안 살았던 집이라 풍경과 얽힌 추억도 참 많았다. 나는 이따금 투명한 방음벽 너머로 차들이 바삐 지나가는 걸 바라보는 게 좋았다. 창밖의 풍경은 마음을 다지기에 좋은 자극제였다. 각종 입시 문제집에 코를 박고 있다가도 이따금 환기를 하려 문을 열 때면 도로가 눈에 들어왔다. 각자의 목적지를 따라 움직이는 차들을 보면 어쩐지 기운이 나곤 했다. 영은 나와 반대로 나뭇잎이나 까치집을 구경했다.
✱
십년지기 정이 날 부른 건, 마지막 가족 모임으로부터 일주일쯤 지났을 때였다. 반년 만이었나, 작년까지만 해도 같은 동네에 살아서 거의 매일 보곤 했는데 정이 다른 지역으로 전근을 가는 바람에 그동안 보지 못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초록불이 깜박였다. 저 멀리서 나를 발견한 정이 팔을 휘저었다. 나도 마주 보고 손을 흔들었다. 정은 지난번에 큰마음 먹고 샀다는, 새카만 색의 코트를 입고 있었다. 중요한 자리라도 다녀왔나 의아했는데 식당에 착석하자마자 청첩장을 건넸다. 정의 것은 아니고 누나의 것이었다. 골목 식당을 선호하던 정이 멀끔한 식당에서 만나자고 한 이유 같았다. 누나가 나보고 꼭 전해주라고 했어. 정이 뿌듯하다는 듯 제 가슴팍을 두드렸다. 아이고, 고마워라. 나는 청첩장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근데 영이는 시간 안 된대? 얼굴을 못 본 지 오래된 것 같아.”
“영이 고기 안 먹잖아. 그래서 밥 약속은 대부분 안 잡으려고 하던데.”
“아, 그러네. 미안하다. 내가 요즘 기억력이 영 안 좋아.”
“뭘 미안할 것까지야. 영이도 조금만 덜 완강하면 좋을 텐데 그러지 않아서 나도 아쉬워. 가족모임도 안 오거든. 너도 알지? 우리 가족 한 달에 한 번은 만나서 오리 먹는 거.”
“알지, 우리 영이… 안 본 사이에 철저한 채식주의자가 됐구나.”
이제 돈 모았으니까 같이 스테이크 좀 썰려고 했는데. 정이 아쉬워하며 이마를 짚었다.
“나도 영이가 왜 이렇게 변했는지 모르겠어. 닭강정이랑 오리고기에 환장하던 애한테 누가 바람을 넣어서.”
“아니, 영이가 어릴 때부터 맨날 창밖으로 새 관찰했다며. 그 새 때문일 수도 있지.”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나는 정을 조금 째려봤다. 뭐가 어때서. 억울해하는 정의 등을 툭 두드리며 일어났다.
“어서 스테이크 가게로 안내해. 사주겠다며.”
그걸 믿냐. 정이 날 비웃었다. 나는 자리에 다시 앉아 정에게 주먹을 들어 올렸다.
“야, 친구한테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
“그래도 너무 뭐라고 하지는 마. 영이가 그 정도로 완강한 거면 뭔가 있겠지.”
정이 덧붙였다. 나는 잠시 침묵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정과 만난 다음날은 눈 예보가 있었다. 일어나자마자 전날 잘 들어갔냐는 그의 연락에 대강 답했다. 정은 요즘 진행 중인 프로젝트 때문에 바쁘다고 했다. 나는 인사팀이라 연말이나 연초 위주로 바빠지지만, 정은 회사에 다니지 않는 프리랜서라 비정기적으로 바빴다. 핸드폰을 끄고 거실 소파에 늘어졌다. 티브이 리모컨을 쥐고 이리저리 볼만한 채널을 찾아 유영했다.
영이 돌아온 건 내가 라면을 하나 끓여 먹은 지도 한참 지났을 때였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울먹였다. 나는 깜짝 놀라 그의 어깨를 붙잡고 물었다. 무슨 일이야? 울먹이던 영이 입을 열었다.
“죽은 새인 줄 알고 사체를 수습하고 있었거든. 근데… 새를 처리하려고 하니까 맥박이 뛰고 있었어. 내 손안에서 죽었어 걔가.”
“새가 죽어가는 걸 너무 가까이에서 봤나 봐.”
나는 영의 등을 툭툭 두드려줬다. 괜찮아. 뭐가 괜찮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지길 바라며 영을 토닥여주었다. 나는 영에게 손부터 씻으라고 당부한 후 이어 말했다.
“어차피 모든 생명은 죽잖아. 운이 안 좋았던 거야. 너도 트라우마 생기기 전에 이런 활동들 좀만 줄이자.”
내가 말을 끝내자마자 영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죽어야 하는 생명이 어디에 있어.”
영이 내게 울며 소리쳤다. 나는 가만히 그 애의 슬픔을 받아 냈다. 여기서 더 자극해 봐야 영은 더 울어버릴 게 뻔했기 때문이다. 여전히 영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 영과의 문제를 떠올리면 자꾸 길을 잃은 것처럼 혼란스러워졌다.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짚었다. 영의 어깨가 손바닥에 금세 덮였다. 나는 그의 어깨를 잠시 토닥이다 손을 뗐다. 나름대로 이해해 보기 위한 신호였다. 영의 세계를 알아야 할 때가 왔다. 나는 말해보라는 의미로 그와 눈을 맞췄다. 영이 식탁 의자에 허물어지듯 앉았다. 나는 커피포트를 데웠다. 컵에 차 티백 하나를 꺼내 넣었다. 가만히 내 모습을 보던 동생의 코는 새빨개져 있었다. 나는 그의 코를 툭 건드리며 옷을 갈아입고 오라고 했다. 주방에 난 창으로 내리기 시작한 눈이 보였다.
언니는 몰랐을 거야. 코를 풀어낸 영이 숨을 고르며 말했다. 옷을 갈아입고 온 지 몇 분도 지나기 전이었다. 내가 이런 일들을 하는 이유를. 나는 적당히 순화해서 물었다.
“그럼 네가 지금 이러는 게 중요한 이유가 있어?”
우리가 모든 죽음을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나도 모르게 목소리에 날이 선 게 느껴진다. 언니는 몰라. 영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전에 살던 집 유리창에 새가 충돌한 적이 있어. 그때부터 못 지나치겠더라고.”
이전에 했던 예상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나는 한숨을 한 번 쉬고 입을 열었다.
“그럼 트라우마 치료나 상담을 받는 게 먼저 아냐? 왜 이 일 때문에 다른 사람하고 어울리지 못할 정도까지 가는데?”
목소리가 점점 커지려 했다. 나는 잠시 영에게서 뒤돌아 내 몫의 차를 우렸다. 따뜻한 액체가 들어가니 조금 진정되는 것 같았다. 영도 차를 한 모금 마시자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가 놀부처럼 새를 괴롭혔어? 매번 너만 손해 보는 일이야. 기부를 해도 되잖아.”
영이 입술을 달싹였다. 길게 한숨을 뱉고 차도 한 모금 마셨다.
“언니, 나는 그 일 때문에 이러는 게 아냐. 그건 단지 계기에 불과해.”
고작 새 때문에 이렇게까지. 나는 입을 열려다 컵을 들었다. 들어가 볼게, 쉬어. 내게 말한 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아, 나는 새보다 너 스스로를 더 소중히 여겼으면 하는데. 내 말을 들은 영이 완전히 뒤를 돌았다.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방문을 닫았다. 나는 이마를 짚고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그동안 내뱉어 본 그 어떤 한숨보다도 길게. 창밖으로 눈발이 거세지고 있었다.
영이 방에 들어가자 나는 밀린 집안일을 해치웠다. 그리고 방에 들어가 영화를 한 편 봤다. 크리스마스 영화를 봤다. 아무런 생각 없이 보기에 좋은 영화였다. 영화 속 치킨은 먹음직스러웠다. 화목한 가족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닭을 조각냈다. 그래서 치킨을 한 마리 시킬까 고민하다 영을 의식해 시키지 않았다. 영화는 계속 흘러가 크리스마스 당일 주인공의 소원이 모두 이루어지며 막바지에 다다르게 되었다. 마지막 기억은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오르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점점 졸려오더니 눈이 감겼다. 나는 예전에 살았던 방음벽 코앞의 집 안에 있었다. 창밖이 보인다. 이름을 모르는 조류 하나기 방음벽 너머에서 빙빙 맴돈다. 저 위로 올라가서 돌진한다. 아마도 방음벽 너머 산으로 가는 듯했다. 빠르고 날렵한 비행이 멈춘 건 새가 방음벽 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갓난아기의 주먹만 한 머리가 부딪친다. 활력 있는 몸짓이 일그러진다. 직선으로 곧게 펼쳐져 있던 날개가 허물어지듯 축 늘어졌다. 잠에서 깬 것은 그로부터 몇 시간 후였다. 어깻죽지가 간지러웠다. 조금 이른 아침인지 밖에서는 동이 터오고 있는 것 같았다. 방 안으로 푸른색 빛이 꾸물꾸물 들어오고 있었다. 간지럼이 더 심해졌다. 나는 머리를 긁다 말고 화장실에 들어가 거울을 봤다. 빽빽한 머리카락 사이로 벌게진 두피가 보였다. 집에 있던 두피 마사지기로 머리를 눌러봐도 간지러움은 여전했다. 머리를 두어 번 더 감고 빗으로 머리를 계속 빗었다. 어느새 방에는 벅벅 머리를 긁는 소리만 들렸다. 화해를 하고 싶었는지 내 방으로 찾아온 영이 무슨 일이냐고 물을 정도였다. 머리가 너무 간지러워서. 아마 내 방문 앞에서는 벅벅벅 긁는 소리만 날지도 모른다. 나는 그 생각도 벅벅 소리를 내며 머리를 긁는 와중에 떠올렸다. 딱지가 생기는 게 느껴졌지만 멈추지 못했다. 가려움은 자꾸만 심해져 이제는 머리를 만질 때마다 올록볼록한 딱지의 촉감이 느껴졌다. 겨울이니 건조해서 생긴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건성 피부가 아니었다.
강철 피부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건강한 피부를 가졌다. 탈모는 더더욱 아니었다. 엄마를 닮아 머리숱이라면 나를 능가할 사람이 없다고 느낄 정도로 많았다. 고민하다 정에게 물어보니 본인도 모르니 지식인에 물어보라는 답만 돌아왔다. 그러니까 네가 직장생활이 안되는 거야. 내 답에 정은 웃기 바빴다. 큰 병일 수 있으니까 종합검진 받아 봐. 은근하지만 지나친 염려는 덤이었다. 종합검진까지는 아니더라도 하루빨리 병원에 가보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등에 두드러기라니. 이게 무슨 일이람. 나는 영이 새의 사체를 보러 가기 위해 신발을 고쳐 신을 때 피부과 예약을 마쳤다. 다녀오겠습니다. 말하는 영의 등에 대고 적당히 하라는 말도 빼먹지 않았다. 영이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주말이 되자마자 병원 피부과를 찾았다.
“이런 증상이 흔하지는 않지만 알레르기 같은데, 검사해 보셨어요?”
의사가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아뇨. 내 대답에 그는 일단 알레르기 검사를 받아보는 걸 권했다. 나는 알겠다고 했지만 검사 키트가 다 떨어져 예약을 잡았다. 하필 인사이동을 결정짓는 시기라 바빠서 검사 날짜는 2주 후였다. 의사는 바르는 약 몇 가지를 처방해 주었고 나는 약국에 가 처방 약 외의 각종 간지럼 약을 잔뜩 사들였다. 집에 돌아와 검색창에 새의 상징이나 해몽 따위도 열심히 찾아봤다. 유사과학이라면 진저리 치는 편이었지만 찝찝함을 지우려는 용도였다. 마침 방음벽 스티커를 붙이고 온다던 영이 돌아왔다. 나는 두피를 살살 마사지해 주는 영에게 물었다.
“영아, 혹시 누가 내 앞에서 죽는 꿈은 뭘 의미하는지도 알아? 악몽을 꿔서.”
“음, 그건 나도 모르지. 왜? 언니 무슨 일 있어?”
걱정스러운 듯 영이 물었다. 나는 별일은 없다고 답하면서 마침 간지러움이 나타나기 전에 악몽을 꿨을 뿐이라고 덧붙였다. 점집이라도 가보자. 영이 권유했지만 나는 믿지 않는다고 답하며 거절했다. 저번에 정을 따라가 본 이후로 점집이라면 질색하는 편이었다. 하여튼, 연고 바르면 나아지겠지. 내 답에 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답했다.
그 이후로 영은 매일 두드러기에 좋다는 약들을 사들고 왔다. 나는 그런 관심이 부담스러워 화장실에 들어가서 효자손을 사용했다. 영은 가끔 몰입하는 면에 있어서 과한 면이 있었다. 결국 고민을 상담할 곳은 정밖에 없었다.
“그러게 내가 건강 좀 챙기랬잖아.”
“밤낮 바뀐 사람이 할 말은 아닐 텐데.”
정이 잠시 웃음을 터뜨렸다. 그건 그래. 정에게 전화를 걸게 된 건 바로 다음날이었다. 어릴 때부터 잔병치레가 가득한 정은 뭔가 방법을 알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삽화가인 그는 마감을 앞두면 밤낮이 자주 바뀌곤 해서 각종 영양제와 보약을 달고 살았다. 가장 좋아하는 티브이 프로그램도 건강과 관련된 것이었다. 분명 이 상황에 대한 조언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정은 온천에 가라는 해결책을 내놓았다. 본인이 두드러기로 한창 고생했을 때 갔던 곳이라며 다른 지역의 온천을 추천해 주었다. 연차랑 휴가 내서 며칠 쉬어야겠다. 가는 김에 영이도 데려가. 나의 말에 정이 답했다.
“이참에 그 문제도 가서 이야기해보면 좋을 것 같으니까. 주변에 철새 군락지가 있대. 비건 식당도 근처에 한 곳 있고.”
“굳이? 영이랑 싸우면 어떡해.”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이잖니, 친구야. 너무 걱정 마.”
나 마감 때문에 바빠. 이만 끊는다. 하여튼 잘 해결하고 연락 줘. 정말 바쁜 건지 정은 내 대답도 제대로 듣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마침 다음 주쯤이면 연차를 쓰기도 적절한 시기였다. 아직 본격적인 성수기는 아니라 그런지 객실도 충분히 남아있었다. 나는 곧바로 영의 방문을 두드렸다. 영이 방문을 닫으며 앞으로 나왔다.
“영아, 다음 주 주말에 나랑 온천 갈래?”
“갑자기 온천을 가자고?”
영에게 두드러기 증상에 대해 말해주면서 의사가 온천을 추천해 줬다고 덧붙였다
영은 잠시 고민하더니 좋다는 답을 들려주었다. 영과 나는 다시 마주 앉아 객실을 골랐다. 영은 온천과 가깝기만 하면 좋겠다고 했지만 나는 높고 큰 창을 가진, 전망 좋은 객실을 원했다. 하나뿐인 동생이지만 이런 면에서도 우리는 상극이었다. 영이 양보하겠다고 했지만 나는 온천과 가까운 객실도 나쁘지 않다며 우겼다. 내 어색한 목소리를 들은 영이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계속 웃는 영을 흘깃 째려봤다. 근데 그때도 눈이 이렇게 많이 내리면 어쩌지. 염려하는 영의 말대로 창밖의 눈은 아직 거세게 내리고 있었다. 금방 그칠 거야. 아까 정이도 일기예보 말하면서 다음 주 주말쯤이면 그친다고 했어. 영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
“언니, 확실히 눈발이 약해지긴 했나 봐.”
영이 트렁크에서 캐리어를 빼다 말고 고개를 길게 뺐다. 나는 영에게 조심하라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의 말대로 끝도 모르게 내리던 눈발이 조금 약해져 있었다. 나는 캐리어 하나를 끌고 지하주차장에서 빠져나왔다. 영이 그 뒤를 따라왔다. 우리는 묵묵히 눈 속을 걸어 로비로 향했다. 로비는 우리가 슬슬 지쳐갈 때쯤에야 발견할 수 있었다. 차갑고 투명한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자 로비가 드러났다. 아치형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가 반사되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로비 내부의 흰색 벽지 위로 크림색 커튼 장식이 달려 있었다. 제법 고급스러운 호텔의 내부를 보니 예감이 좋았다. 오늘이 효자손을 버리는 날일지도 모른다. 영도 그걸 느낀 듯 내게 호텔이 참 고급스럽다고 말했다. 나는 객실 열쇠를 받자 영과 함께 객실로 향했다. 저 멀리 온천탕이 보였다. 신기해하는 영을 보며 문을 열자 영은 또다시 감탄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감탄하는 거야? 내 물음에 영은 여행이 오랜만이라 뭐든 들뜬다고 답했다. 나는 그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어 준 후 창가로 걸어갔다. 눈이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그러자 나는 영을 불러 오랜만에 배달음식을 먹자고 설득했다. 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고기를 먹으러 가자는 말 대신 단백질을 많이 먹자고만 했다. 영도 별다른 말없이 동의했다.
호텔에 있는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바로 온천으로 향했다. 널찍한 복도를 걸어가던 도중에 영이 유리 방음벽을 발견했다. 시선을 못 떼고 계속 쳐다보는 게 여행이 끝나기 전에 한 번쯤은 들릴 것 같았다. 나는 영의 어깨를 툭 치고 모르는 척 왜 그러냐고 물었다. 영은 솔직하게 저 유리 방음벽이 신경 쓰인다고 말했다. 나는 이곳에도 조사하는 사람이 있지 않겠냐고 영을 달랬다. 눈발이 점차 거세지는 가운데 방음벽을 가는 건 그냥 고생일 뿐이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영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일상이 어쨌건 쉬러 와서까지 고생을 하는 건 아까웠다. 사서 고생 아니겠냐는 내 말에 영의 표정이 조금 더 구겨졌다. 나는 한숨을 눌러 참으며 일단 온천부터 가고 결정하라고 말했다. 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뜨거운 거 아냐?”
“그냥 들어와.”
곧장 탕에 들어간 영이 내 팔을 잡았다. 다행히 미온수와 온수 사이 정도의 온도라서 금세 목까지 넣었다. 따뜻한 액체 속에 있으니 등도 덜 간지러운 느낌이었다. 요 며칠간 야근을 해 뭉친 어깨도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정의 말대로 만들어진지 얼마 안 된 온천 호텔이라 그런지 주말치고는 제법 한산해서 더 좋았다. 그래서인지 나와 영이 들어간 탕에는 둘 뿐이었다. 탕은 커다란 창문과 붙어있어 바깥으로 눈이 날리는 게 그대로 보였다. 영은 눈을 만지고 싶은 건지 괜히 손을 뻗어보고 창에 달라붙는 눈을 관찰했다. 나는 찰박찰박 소리를 내며 어깨에 물을 끼얹었다. 영의 어깨너머 타일을 보며 멍을 때렸다. 영이 나를 부른 건 내가 눈을 감고 졸기 시작할 때였다. 언니, 아까 했던 말 기억해? 괜한 고생이라고 했던 거. 고개를 들어 영을 보니 아까처럼 불편한 표정은 아니었다. 나는 어쨌든 네 자유 아니겠냐고 답했다. 내가 좋든 싫든 알아서 하라고 답했다.
“나는 그런 게 고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날 걱정하는 거라면 나는 괜찮아.”
“그건 그냥 보람찬 고생 아닐까? 네가 고생하는 건 맞잖아. 힘들지는 않아도.”
바깥은 여전히 흐렸다. 눈보라가 좀 더 거세지고 있었다. 오늘 밖에 나가기는 무리겠네. 영이 중얼거렸다. 그러게. 그 유리 방음벽 갈지도 내일 정해야겠다. 내 말을 듣고 잠시 침묵하던 영이 입을 열었다.
“그럼 나는 보람차게 고생하는 걸로 하자. 나쁜 일도 아니니까.”
영은 뿌듯하다는 듯 작게 미소 지었지만 나는 나쁜 일이 아니라는 영의 말이 걸렸다. 틀린 말이 아닌데도 그랬다.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 나갔다.
“근데 그럼 그동안 널 기다린 우리나 친구들은.”
문장을 뱉다가 멈췄다. 이을 말을 찾지 못했다. 우리가 뭔가를 완전히 바꾸지는 않았지만, 영도 영의 방식을 고수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영의 친구들이나 우리 가족들은 한 번씩 채식 식당에도 갔고, 영의 친구들 중 몇은 영이 변한 원인을 찾으려 그 유리 방음벽에도 함께 다녀갔다. 그래서 나는 영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영이 이토록 고수하려는 것들을 좋아할 수도 없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잠자코 있던 영이 창문을 보며 크게 한숨을 쉬었다. 바깥에서는 눈보라가 한창이었다. 낮인데도 곧 해가 질 것처럼 어둑했다.
“언니, 이건 양보 같은 게 아니야. 내가 욕심을 내는 게 아니라니까.”
“나도 모르겠다. 아니라는 거는 아는데 자꾸 그렇게 느껴져.”
영은 억울하다는 듯 말하자 도리어 내가 억울한 기분을 느꼈다. 나는 미간을 누르며 말을 이었다.
“영아, 한 발만 물러주는 건 안 돼? 다들 네 행동을 싫어하지는 않지만 매번 너만 소외되고 있잖아. 세상에 선행을 할 수 있는 방법은 많아.”
“언니.”
영이 나를 불렀지만 나는 말을 멈출 생각이 없었다.
“나는 네가 어느 정도 눈 감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고 봐. 그냥 적당히 편하게 사는 건 안 되겠어?”
결국 종지부를 찍었다. 영의 표정은 이미 일그러진 지 오래였다. 숨을 몇 번 고르던 영이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그렇게 살 수 없어. 그게 더 고생이야.”
영이 다시 말을 이었다.
“언니도 알잖아. 저번에 나는 잔정이 많다고 한 거 기억나지? 나는 원체 그런 성격이라 이런 걸 챙기지 않는 게 힘들어.”
창밖의 눈발이 조금 약해졌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알지. 근데 나는 너를 이해하기가 너무 어려워. 엄마도, 아빠도 그렇고.”
정은 시간이 지나면 널 이해하게 될 거라고 했지만 그게 될지 모르겠어. 나는 양손을 얼굴에 덮어 문지르며 말했다.
“그럼 언니도 내 친구들처럼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보는 건 어때?”
이미 다 알고 있잖아. 내 말에 영은 직접 보는 건 어떠냐고 물었다. 사체를 보기는 거북하지만 이대로면 영영 우리가 이런 사이가 될 것 같았다. 나는 느리게, 그리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내 대답에 영은 고맙다고 말해주었다.
어느새 하늘이 조금 더 어두워졌다. 온천 입구에서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온천에 놀러 온 가족들인 것 같았다. 우리는 언제쯤 함께 할 수 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영은 아직 눈보라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쪼글쪼글하게 불어버린 손가락을 바라봤다. 가자. 내 말을 들은 영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응. 우리는 눈보라가 치는 창에서 등을 돌려 출구로 향했다.
우리는 조식을 먹고 방에서 장갑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유리 방음벽까지는 걸어서 3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호텔에서 봤을 때는 몰랐지만 방음벽은 영이 조사차 가는 아파트의 방음벽보다 컸다. 영이 내게 장갑을 건넸다. 추워서 낀 털장갑을 벗고 영의 면장갑을 꼈다. 영은 방음벽에 바짝 붙어야 한다며 산책로에 서 있는 나를 손짓했다. 나는 버석하게 마른 잔디를 밟고 영에게 갔다. 눈이 어제보다는 훨씬 덜 내려서 다행이었다. 아니었으면 미끄러졌을 테니까.
“이제 찾아다니면 돼.”
나는 알겠다고 대답하고 이리저리 걸어 다니며 새의 사체를 찾았다. 별 소득은 없어 발걸음을 돌리려는 찰나 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찾았다. 나는 영에게 다가갔다.
“나도 보여줘.”
자, 여기. 영이 보여준 것은 회색의 콘크리트 조각 같은 물체였다. 이게 뭔데? 내 물음에 영은 새의 머리뼈라고 답했다. 영은 종량제 봉투에 그걸 담았다. 이걸 종량제 봉투에 담아? 내 물음에 영은 법적으로 동물의 사체는 종량제 봉투에 담아서 처리하는 거라고 했다. 본인은 다른 봉사자들과 정보를 공유해 괜찮은 곳을 찾아 묻어주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이렇게 종량제 봉투를 사용할 때도 있다고 했다.
“사체를 이렇게 버리는 건 좀 찝찝하다. 너는 찝찝하지 않니?”
“찝찝하지. 그러니까 하는 거야. 인식이 나아지면 어디선가 방법이 하나둘 마련되거든.”
영은 몇 걸음을 옮기더니 다시 뭔가를 찾아냈다. 이번에는 온전히 몸통과 머리가 남아있는 사체였다. 영은 옆에 작은 카드를 놓고 그걸 찍었다. 새의 크기를 가늠하기 위한 카드라고 했다. 이걸 앱에 올리면 나중에 통계자료로 쓰일 거랬다.
방음벽 절반을 돌았을 무렵, 우리가 수집한 새의 사체는 열댓을 넘었다. 눈이 드문드문 쌓여있어 온전한 사체 위주만 찾을 수 있었기 때문에 눈이 내리지 않았다면 그보다 많을 수도 있었다. 깃털을 주워 담고 사진을 찍는 영을 위해 봉투를 들어주었다. 사체를 보는 게 꺼려지는 건 맞지만 이제 와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몇 마리의 새가 죽는 게 중요한 이유는 그게 몇 번의 죽음이기 때문이다. 새의 사체를 직접 옮기고 아직 벌레가 꼬이지 않은 부드러운 털을 보니 그 생각이 들었다. 몇 번의 죽음은 몇 십 번의 죽음이 되고, 몇 십은 몇 백이 되는 식으로 죽음은 덩치를 불려 간다. 새를 경시하는 시선들이 인간에게 옮겨갈 수 있다. 목을 앞뒤로 움직여대며 걷는 그 징그러운 비둘기들을 혐오하는 시각은 금세 인간에게 투영된다. 연쇄살인범도 동물부터 죽인 댔으니까 아마도 맞을 것이다. 나는 이렇게 이해하기로 했다. 벌써 눈이 멎어가기 시작했다. 저 앞에서 눈이 멎어간다고 좋아하는 영이 보였다.
죽은 새들은 몸통이 사라져 있다고 했다. 정확히는 수거되었다. 경비원같이 방음벽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치운다고 했다. 반질하고 새카만 부리를 바라본다. 이 새가 살아있을 적에는 어떤 각도로 벌어졌을지 궁금해진다. 저절로 머릿속에 장면이 재생된다. 먹이를 섭취하는 모습이나 지저귈 때의 모습 따위가. 짧은 상상이 끝나면 눈앞의 사체가 더욱 생생하다. 머리가 없어진 새. 언젠가 꿈속에 나오면 어떡하지.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는 발걸음을 멈춰야 했다. 찝찝한 기분이 들었지만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방음벽 안쪽을 전부 돌아봤다. 이제 방음벽 바깥쪽을 돌아볼 차례였다. 바람의 흐름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다. 공기가 차다. 뒤통수를 지나 저 앞까지 밀려가는 바람이 불어왔다. 하나둘 내리던 눈이 그쳐있었다.
눈이 그치니 굳이 택시를 부르지 않아도 식당까지 걸어갈 수 있었다.
“이쪽이야.”
영이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갔다. 우리가 간 식당은 비건 양식집이었는데, 따라와 준 영을 위해 찾아둔 곳이었다. 원색의 밋밋한 간판과는 다르게 내부는 소담하게 꾸며져 있었다. 테이블마다 꽃병과 테이블보가 있었고 메뉴판의 메뉴들도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이전에 가족들이 다 함께 갔다가 실망했던 채식 식당과는 달랐다. 나는 메뉴판을 찬찬히 읽다 비건 피자를 하나 시켰고 영은 파스타를 시켰다. 직원이 피자는 시간이 걸린다고 했지만 괜찮다고 답했다. 나는 아직 간지러움이 남아있는 머리를 티 나지 않게 손톱으로 꾹꾹 누르며 핸드폰을 켰다. 아빠에게서 오리고기 식당에 산채비빔밥이 생겼다는 소식이 도착해있었다. 영에게도 한 번 말해보라길래 곧장 영을 불렀다.
영아, 그 오리고기 식당 기억하니. 영은 기억난다고 답했다. 거기에 산채비빔밥 생겼대. 다음에 가볼래? 영은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잘 생각했다고 말하며 그의 어깨를 툭툭 토닥였다. 근데 고기 냄새는 괜찮겠어? 그럼 가서 삼겹살 시켜서 먹어. 영의 말에 나는 다시 핸드폰을 꺼냈다. 두 사람에게서 좋다는 답이 돌아오자 영에게 핸드폰 화면을 보여줬다.
“그래, 다음에는 갈게.”
내가 웃으며 잘 결정했다고 말할 때 음식이 나왔다. 피자를 잘라 입에 넣었다. 짭조름하고 고소한 맛이 입안으로 퍼졌다. 내가 시킨 건 토마토와 어린잎이 들어간 피자였는데 생각한 것과 달리 기름지고 짭짤했다. 이것도 할만한 것 같아. 문득 내가 영에게 말했다. 그치? 영은 파스타를 돌돌 말아 입에 집어넣었다. 응. 피자를 우물우물 씹던 내가 답했다. 비건 양식은 나와 잘 맞는 것 같다고 하는 내게 영은 다음에 함께 가보자고 제안해 주었다. 그 이후로 나는 종종 영이 원하는 식당을 같이 다니기로 했다. 내가 조금 바뀐 만큼 영도 가족 간의 회식에 동의하게 됐다.
✱
“큰 이상이 있는 건 아니고요. 일시적인 스트레스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저번보다는 나아지신 것 같으니까 약 처방해 드릴게요.”
병원을 찾은 건 온 가족이 모이기로 한 날이었다. 약속 시간까지는 조금 빠듯했지만 검사 후 별다른 치료를 받지 않아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었다. 이미 저 멀리서 영이 아빠와 대화하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영은 내게도 방음벽 저감조치 스티커에 대해 말했다. 이번에 할인을 해서 왕창 사두겠다는 말이었다. 나는 좋은 생각이라며 답하며 엄마를 찾았다. 엄마는? 내 말에 아빠가 화장실에 갔다고 답해주었다. 마침 바로 옆에 있는 화장실에서 엄마가 나왔다. 내게 어서 오라고 말한 엄마가 중얼거렸다. 자리에 앉자 금세 고기와 산채비빔밥이 나왔다.
“오랜만에 오니까 좋네.”
영이 이 말을 한 건 고기가 거의 다 익어갈 때쯤이었다. 영은 산채비빔밥에 참기름을 잔뜩 둘러서 비볐다. 의아해진 나는 진심이냐고 물었다. 영은 바로 옆 도로에 위치한 유리방음벽을 가리켰다. 저 유리방음벽에 스티커 붙여진 거 보여? 여기 사장님도 붙이는 데에 참여하셨대. 눈을 찡그리고 고개를 쭉 빼서 바라보니 정말로 스티커가 붙어있었다. 의외의 인물이네. 내가 답했다. 그치. 제법 신난 목소리의 영이 말했다. 산채비빔밥 맛있니? 엄마의 물음에 영은 “가본 곳 중에서 탑 파이브에 들어요.”라고 답했다. 오늘따라 하늘이 맑네. 계속 눈만 오더만. 아빠의 말에 하늘을 봤다. 오랜만에 날이 개어있었다.